쇼와 시대(1945~1989)의 하치조지마섬: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1945년
2월
미군기의 하치조지마섬 공습
하치조지마섬은 사이판과 티니언섬을 기지로 한 B-29 편대의 일본 본토 폭격 경로 바로 아래에 있어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총 26회의 공습을 받았고, 섬 주민 11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2월
섬 주민에게 내려진 일본 본토 소개 명령
4월
소개선 ‘도코마루’가 미국 잠수함에 격침
섬 내 마지막 소개자와 부상병 등 113명을 포함한 160명을 태운 도코마루가 미쿠라지마섬의 남쪽 해상에서 미국 잠수함의 어뢰 2발을 맞고 침몰했습니다. 지청·사무소 인원과 교원 등을 포함한 섬 주민 55명이 모두 사망하고, 11명만이 구조되었습니다.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여 태평양 전쟁 종결
10월
미군이 섬에 상륙하여 포대와 진지, 폭약 등 폭파 개시
연말까지
귀환선이 11회 입항하여 잇따라 섬으로 돌아오는 사람들
1941년
소학교가 국민학교로 이름 변경
국가주의적 국민교육을 목적으로 한 국민학교령에 따라 1941년부터 일본 소학교는 국민학교가 되었습니다.
12월 8일
태평양 전쟁 발발
1944년
5월
세이류마루가 잠수함에 격침되어 하치조지마섬의 젊은이 57명 사망
세이류마루가 잠수함에 격침되어 하치조지마섬의 젊은이 57명 사망 5월 11일에 도리시마섬 근해에서 상병으로 송환되는 병사를 태운 세이류마루가 미국 잠수함에 격침되어 함께 타고 있던 하치조지마섬 관계자 57명이 사망(15명 구출). 희생자는 지치지마섬 방위 거점 정비를 위해 보내졌다가 귀환 중인 젊은이들이었습니다.
6월
육해공군이 잇달아 주둔하며 공공시설 접수
7월
하치조지마섬 주민의 제1회 소개(疎開) 개시
11월까지 일본 본토로 대피하라는 소개 명령이 내려져 약 6,500명이 일본 본토로 소개했습니다.
새로운 비행장 건설
건설은 강제 연행된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1927년
1927년 9월에 오카고무라에서 최초의 전등이 켜졌고, 이듬해에는 가시타테무라와 나카노고무라에서, 1929년에는 스에요시무라에서도 전등이 켜졌습니다. 미쓰네무라의 경우 1928년에 다른 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전등이 켜졌습니다. 수력 발전은 1972년 하치조지마섬 동쪽 앞바다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수로가 파괴되어 45년의 역사에 막을 내렸습니다.
하치조지마섬 해군 비행장 개장식 개최
현재의 후지 중학교 앞 후지미와 오카자토 지구에 해군 비행장이 건설되어 10월 3일에는 축하식이 열렸고, 4일에는 비행기 2대와 비행정이 처음 착륙하여 섬 주민 전체가 그 광경을 견학했습니다.
1933년
하치조지마섬 최초의 전화 설치
섬 내 각 우체국에서 전화 교환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개국 당시 가입 수는 61로, 여러 관청·사무소, 어업협동조합, 의원 등이 가입했습니다.
1934년
가미나토 항구 건설공사 개시
미쓰네무라 출신 모테기 야오이치의 노력으로 인해 도쿄도 사업으로 가미나토 보수 공사가 시작되어 내무성 지정 항만이 되었습니다.
1936년
도카이 기선 다치바나마루로 관광단 460명이 섬 방문
정기선 발달을 배경으로, 1933년~1934년경부터 관광단이 섬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1936년에는 460명, 1938년에는 700명의 관광단이 도카이 기선 주식회사의 다치바나마루로 섬을 방문했습니다.
1939년
목조 단층건물인 하치조지청 청사(현재의 하치조지마섬 역사민속자료관) 신축
옛 청사 터 부지에 목조 단층건물인 하치조지청 청사(현재의 하치조지마섬 역사민속자료관)를 새로 지었습니다.